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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네 기둥--사주(四柱)

의재 2011. 7. 18. 17:45
  나는 길을 가다가 집 짓는 곳이 있으면, 이리저리 살피곤 한다. 집 짓는 것을 보면, 집터를 닦은 뒤에 먼저 기둥을 세우는데, 세워 놓은 네 기둥을 보면, 그 집의 넓이와 높이 등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사람의 운명에 비유해 보면, 집의 네 기둥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정해지는 사주(四柱)이고, 집은 그 사람의 삶이 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운명의 네 기둥, 즉 사주가 정해지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을 운명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이러한 운명 결정론을 지니고 살아왔다. 모든 것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따지며 사는 현대인들도 이런 의식을 지니고 있다.

  운명의 네 기둥이란 뜻을 지닌 사주(四柱)는 태어난 해와 달과 날짜와 시각을 각각기둥으로 하는 연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를 말한다. 이것을 식물과 사람에 비유하면, 연주는 뿌리/조상, 월주는 싹/부모, 일주는 꽃/나, 시주는 열매/자녀에 해당한다 하겠다.

  사주는 흔히 10간(干) 12지(支)를 조합한 육십 갑자(六甲)로 말한다. 연주는 태세(太歲)라고도 하는데, 해의 차례에 따라 육갑으로 나타낸다. 1998년을 무인년(戊寅年)이라 하고, 1999년을 기묘년(己卯年)이라고 하는 것은 연주 또는 태세에 따른 것이다. 월주는 월건(月建)이라고도 하는데, 이 역시 달의 차례에 따라 육갑으로 나타낸다. 새해인 1999년 음력 1월의 월건은 병인(丙寅)이다. 일주는 일진(日辰)이라고도 하는데, 이 역시 하루하루를 차례에 따라 육갑으로 나타낸다. 1999년 설날(양력 2월 16)의 일진은 기해(己亥)이다. 시주는 태어난 시각을 시 계산법에 따라 육갑으로 말하는 것이다. 밤 11시부터 1시를 자시(子時)라 하고, 그로부터 두 시간을 단위로 하여 축시, 인시, 묘시, 진시, 사시, 오시 등으로 말한다. 시 계산법에 따르면, 1999년 음력 1월 1일 낮 12시는 경오시(庚午時)이다. 그러므로 1999년 음력 1월 1일 낮 12시에 태어난 사람의 연주는 '기묘', 월주는 '병인', 일주는 '기해', 시주는 '경오'이다. 이를 육갑으로 말하면, 모두 여덟 글자가 된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은 아주 팔자 좋은 사람이야.',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인가.' 등의 말을 하는데, 이것은 사주를 육갑으로 말하면 여덟 글자가 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사주 팔자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사주는 어린아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정해지는 것이므로 그 사람의 의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정해진다고 하니, 이것이 타당성이 있는 것인가? 이것이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면, 사주가 같은 사람의 운명은 똑같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전부터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고, 따로 공부할 기회도 없어 묻어두고 지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무속과 점복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던 중 역리(易理)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들의 논리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만났던 역리학자 중의 한 사람은, 사람의 삶은 숙명(宿命)과 운명(運命)이 있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주로 타고난 것은 숙명이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조금씩 변하는 것이 운명이라고 하였다.

  내가 아는 쌍둥이 형제는 20분 간격으로 태어나서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는 추첨에 의한 학교 배정으로 서로 다른 학교를 다녔다. 대학을 진학할 때, 형은 문과 계통의 학과에, 동생은 자연과학 계통의 학과를 진학하였다. 그 후 연락이 끊겨서, 그들이 대학을 졸업한 뒤에 어떻게 사는 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전공이 다른 쌍둥이 형제의 삶의 모습은 똑같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쌍둥이 형제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서로 다른 운명 대로 사는 것을 역리학자들은 두 사람의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주가 같아 같은 숙명을 타고났지만, 이름의 작용으로 운명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쌍둥이 자매의 경우, 초·중·고교까지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교육대학을 다닌 후 교사가 되었다. 몇 년 뒤에 혼인하여 살고 있는데, 두 자매의 삶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이것은 이름이 다르고, 혼인함에 따라 서로 다른 배우자의 운이 작용하여 자매의 운명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험한 일, 괴롭고 슬픈 일 보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 온 문제이다. 첫째는 좋은 사주를 타고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타고난 운명을 미리 알아 이를 바꾸는 일이다.

  좋은 사주를 타고나기 위해 사람들은 출산 시기를 계산해 보고, 좋은 사주를 타고 날 가능성이 있는 때에 출산할 수 있도록 임신 시기를 조절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부부간에 동침하는 것도 아무 때나 하지 않고, 이를 계산해서 하였다고 한다. 또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지면 일주와 시주를 미리 따져보고, 좋은 날·좋은 시에 출산할 수 있도록 출산 일자와 시각을 앞당기거나 늦추기 위한 여러 가지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요즈음에는 좋은 일주와 시주를 계산해 보고, 그 시각에 맞춰 제왕절개 수술을 받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역리를 연구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제왕절개 수술에 의해 일주와 시주를 조절하는 것은 인위적인 조작이기 때문에 효험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자기의 사주는 이미 결정되어 어쩔 수 없으나 자녀나 손자만은 좋은 사주를 타고나게 하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인데,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앞일에 대해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점복자(占卜者)를 찾아가 문복(問卜)을 하기도 한다. 문복을 하여 점괘를 받은 뒤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앞날에 어떤 불행이나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 그 일을 막기 위해 조심하며 부적을 사용하기도 하고, 비손이나 굿 등 액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행위를 한다. 이것은 타고난 운명을 미리 알아보고, 이를 바꾸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점을 한 뒤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점괘를 믿으며 그 일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스스로 일의 성취를 예언하고, 노력하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자성예언(自成豫言)'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액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은 주술성을 띤 경우가 많아서 타당성을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매사에 삼가고 신중을 기하면 불행을 막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는 운명의 네 기둥, 사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주에 의해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운명론은 성장 환경, 교육 환경, 본인의 의지와 노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므로 신뢰성이 희박하다. 나는 이런 운명론에는 회의를 가지면서, '성격이 운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성격은 타고난 체질, 가정 환경, 교육 환경과 본인의 자각과 노력에 의해서 형성된다. 이러한 성격을 바탕으로 자기의 가치관, 인생관, 결혼관, 직업관 등이 형성된다. 운명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자기의 성격과 가치관에 따라 자기와 관련된 일을 선택하고, 판단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 둘레에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노력한다. 그런 사람은 처음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그 일을 성취하고야 만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은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남을 탓하고, 원망하며, 좌절하고 만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힘들고 괴롭게 살면서 팔자 타령을 하기 일쑤이다.   

  우리는 운명론에 빠져 팔자 타령을 하거나, 점복자의 말에 현혹되어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자기 여건에서,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바르게 판단하고, 최선을 다하면,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곧 운명을 개척하는 길이다.           

    <농지개량 제179호(서울 : 농지개량조합연합회, 1999. 1)에 수록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