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자
요즈음 나이가 든 남성들은 밖에 나갈 때 대부분 모자를 쓴다. 모자는 대개 운동모자(야구모자)· 베레모 · 중절모 등으로, 그 모양이나 색상 · 재질 등이 다양하다. 나 역시 외출할 때에는 모자를 쓴다. 그날 가는 곳, 날씨, 모임의 성격, 입을 옷이나 신발 등에 맞게 골라서 쓴다.
내가 모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나이 50대 후반부터이다. 50대 초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더니 50대 중반을 지나니 머리숱이 많이 줄었다. 그에 따라 추운 날에는 머리가 시리고, 햇볕이 쬐는 날에는 머리가 따가웠다. 이런 사정을 들은 선배 교수가 모자를 쓰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추운 날씨에는 머리숱이 적어짐에 따라 느끼는 추위를 막고, 더운 날에는 머리에 햇볕이 직접 쬘 때 따가운 것을 막기 위해 모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자외선이 얼굴에 비치는 것을 차단하고, 흰머리가 드러나는 것을 가리려는 뜻을 추가하여 모자를 쓰곤 한다.
처음에는 체육행사 때 받아다 두었던 운동모자를 썼다. 이를 본 아내가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날이 있다며 베레모를 사다 주어 즐겨 썼다. 그 뒤에 대학원 제자들이 중절모를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작아서 백화점에 가서 제일 큰 것으로 바꿔 왔다. 그래도 작아서 불편하였지만, 이를 선물로 준 대학원생들의 정성을 생각하여 가끔씩 썼다. 아내는 내 머리가 커서 기성품 중에서는 맞는 모자를 찾기 어려우므로 따로 주문해야 한다고 하였다.
내 머리가 보통 사람들보다 큰 편이어서 기성품 중에는 맞는 모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군에 입대하였을 때 처음 알았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인제에 있는 부대에 배속되어 일등병으로 진급했을 때의 일이다. 이등병 계급장이 달린 찌그러진 모자를 버리고 새 군모를 사려고 부대 PX에 가서 골랐으나 내 머리에 맞는 것이 없었다. 이를 본 PX 근무병이 내 머리를 재어 보고는 ‘최 일병 머리통은 특제’라고 놀리면서 주문해 주어 며칠 뒤에 받아서 썼다.
튀르키예에 근무할 때 이스탄불에 있는 그랜드파자르(국제시장)에 가니 양가죽으로 만든 베레모와 방한모가 눈에 띄었다. 가죽의 품질과 촉감, 색, 모양이 좋고 가격도 적절하여 사고 싶었으나 좀 작아서 망설였다. 이를 본 모자점 주인이 계속 쓰면 늘어날 것이라며 권유하는 말을 듣고 사 왔다. 그러나 몇 년을 써 보았지만 늘어나지 않아 불편하여 지인에게 주었다.
그 뒤에 아내와 나는 큰 모자 도매상이나 백화점에 가면 내 머리에 맞는 모자가 있는가 살피고, 눈에 띄면 사 왔다. 몇 년 전에는 작은아들이 영국에서 크기가 넉넉하고, 색과 천이 좋은 베레모를 사 왔다. 작년 미국에 사는 딸의 집에 갔을 때 규모가 큰 쇼핑몰에 갔다가 내 머리에 맞고 챙이 넓은 등산모와 통풍이 잘되는 중절모를 발견하였다. 나는 ‘모자가 많은데 또 사려느냐’며 만류하는 아내의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서 가지고 왔다.
이제 우리 집에는 챙이 넓은 야구모자와 등산모자, 귀마개가 있는 방한모, 색과 질감이 다른 베레모와 중절모 등 여러 개의 모자가 있다. 작게 느껴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자 여러 개를 지인에게 주었어도 20여 개가 남아 있어 외출할 때마다 골라서 쓴다. 편한 복장으로 산책을 나갈 때에는 운동모자를 쓰고, 친구들과 야외에 나가서 낮은 산을 오르거나 둘레길을 걷는 날에는 챙이 넓은 등산모를 쓴다. 시내에서 지인들을 만나거나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 양복 차림으로 갈 때에는 베레모나 중절모 중에서 천의 색상과 재질이 분위기에 맞는 것을 골라 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자들은 나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나와 함께 할 필수품이다. 이들을 용도에 맞게 잘 활용하며 이것들과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도록 건강관리에 힘써야겠다. (2025. 6.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