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과 평강 이야기에 담긴 뜻
얼마 전에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자리한 아차산에 갔다. 이 산에는 백제가 쌓은 아차산성도 있고, 고구려가 쌓은 보루도 있다. 나는 홍련봉 1, 2 보루를 보면서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이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달과 평강」 이야기는 ‘바보 온달’이 ‘울보 평강 공주’와 혼인하여 출세한 이야기로 매우 흥미롭다.
온달은 정말 바보였을까? 그가 정말 바보였다면 평강 공주가 아무리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잠재력을 계발하며 가르쳤다 하여도 온 나라의 장정이 모이는 사냥대회에서 우승하고,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실려 있는 《삼국사기》 권제45 「열전」을 보면, 온달은 몹시 가난하여 해진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데다가 얼굴이 기이하게 생겨 우스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맑고 깨끗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잘 살펴보면 그는 옷차림이 허름하고, 얼굴 모습이 좀 이상하게 생겼으므로 사람들이 놀리는 말로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을 뿐이고, 실은 뛰어난 자질을 지닌 청년이었다.
역사학계에서는 몇 년 전에 온달(溫達, ?~590) 장군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건너온 왕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나왔다. 연세대학교 지배선(역사문화학) 교수는 그의 논문 「사마르칸트와 고구려 관계에 대하여」에서 ‘온달 장군은 서역인과 고구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가정의 자녀로, 고구려 장군의 지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온달은 당시에 상업이 발달했던 사마르칸트의 왕족이 정치적 이유로 피신하여 고구려에 와서 고구려 여인과 산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는 평강 공주와 혼인하고 공주의 내조 덕에 타고난 자질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고구려 상류층으로 진출한 인물이다.
온달은 산 밑에 살면서 밥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고,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연명하는 하층민이었다. 평강 공주가 최고의 귀족인 상부 고씨와 혼인을 마다하고 온달과 혼인한다는 것은 당시의 신분제도와 관습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평강왕은 어렸을 때 울기를 잘하는 공주를 놀리는 말로 “너는 늘 울기만 하여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이 말을 마음에 새기며 자란 평강 공주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궁을 나와 온달과 혼인하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당시의 신분제와 관습을 깰 수 없었다. 평강 공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당시의 신분제도와 관습을 깨고 온달과 혼인하였다.
장군이 된 온달은 한강 유역의 땅을 신라에게 빼앗긴 것을 원통하게 여겨 이를 다시 찾을 결심을 한다. 그는 영양왕의 허락을 받고 출정하면서 계립현(문경)과 죽령(경상도와 충청도 경계)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남방정책을 적극 지지하면서 실천하려는 온달의 굳은 의지와 결의를 말해 준다. 이런 마음은 당시 고구려인이 지녔던 기상과 애국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충주 지방에는 평강공주가 가난하고 무식했던 온달과 혼인하는 과정, 온달이 평강 공주의 내조를 받아 장군이 되어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는 과정 등이 《삼국사기》의 내용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흥미롭게 구성된 전설이 전해 온다. 나는 이 이야기를 1997년에 채록하여 《함께 떠나는 이야기 여행》에 수록한 바 있다. 한때 고구려가 점령하였던 충주시 상모면에는 온달 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과 말무덤이 있다. 말무덤은 온달 장군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 전설의 증거물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온달 장군은 아단성(阿旦城) 전투에서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온달 장군이 전사한 아단성이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이라는 설이 있지만, 서울 광진구와 구리시에 있는 아차산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온달 장군의 관은 운구하려고 하니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판이 났으니 마음 놓고 돌아가시오.”라고 하니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관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그의 국토 회복을 이루지 못한 한이 깊었음을 말해 준다. 공주의 위로를 받은 뒤에야 관이 움직였다는 것은 그의 공주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극진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 이야기에 담긴 뜻을 보면, 먼저 말조심할 것을 일깨워 준다. 특히 어른의 말은 어린이의 마음에 큰 영향을 끼치므로, 항상 조심하여야 한다. 귀족과의 혼인을 마다하고 하층민인 온달을 찾아가는 평강 공주의 행위는 당시의 관습을 깨고 자아를 실현하는 쾌거였다. 공주가 온달에게 말 고르는 법을 비롯하여 고구려 젊은이가 갖춰야 할 지식과 교양을 가르쳐 출세하게 한 것은 내조의 공을 쌓는 여인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온달은 평강공주의 내조를 받으며 심신을 수련하여 실력을 기름으로써 전국사냥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후주가 쳐들어왔을 때 전공을 세움으로써 왕으로부터 “네가 과연 내 사위로구나!”라고 인정을 받는다. 이는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을 통해 성공한 젊은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혼인을 할 때에는 양가의 문벌이나 학식, 재산 등에서 넘치거나 처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중 신랑의 형편과 처지가 신부의 그것만 못할 때에는 처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신부와 힘을 합하여 무언가를 보여주면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자기의 운명을 개척한 평강 공주, 아내의 내조를 받으며 잠재력을 계발하고 실력을 길러 출세한 온달 장군의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흥미와 재미만을 좇을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며 감상해야 한다. 그러면 재미와 흥미로움에 더하여 삶의 지혜와 교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문학 유산을 대하는 바른 자세일 것이다. (2024.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