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산문

수덕사 관음암과 버선꽃

의재 2024. 6. 3. 17:47

   수덕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에 있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이 만들어 낸 덕숭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다닌 갈산초등학교, 갈산중학교, 홍성고등학교는 10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그래서 초·중·고교 시절에 78회 소풍을 갔던 친숙한 곳이다.

   이 절은 백제 위덕왕(554597) 때 창건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건물과 석탑이 있지만, 가장 주의를 끄는 곳은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1308)년에 건축된 목조 건물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과 함께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로 유명하다.

   나는 얼마 전에 수덕사를 다시 찾았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여러 번 왔던 곳이지만, 다시 이곳저곳을 살펴본 뒤에 대웅전 뒤편에 있는 큰 바위 관음암 앞에 섰다. 그 앞에는 불상이 서 있고, 돗자리가 깔려 있다. 그 옆 축대의 벽면에 수덕 각시가 바위틈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을 간략히 적은 대리석판이 붙어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니, 관음암을 가리키며 이 바위가 수덕 각시가 들어간 바위라고 하면서 둘러보고 가는 사람, 대리석판에 새긴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고 가는 사람, 불상 앞의 돗자리에 신발을 벗고 올라서서 절하며 소원을 비는 사람이 있었다. 수덕 각시가 절을 중창하고 바위 속으로 들어간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비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수덕 각시 이야기를 어렸을 때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전설을 채록하려고 이곳에 와서 1999년에는 수덕사 포교국장 정암 스님, 2001년에는 이곳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홍순목 씨에게서 이 이야기를 채록하여 《함께 떠나는 이야기 여행》(민속원, 2001)에 수록하였다.

   정암 스님이 구연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수덕사의 규모가 아주 작을 때 수덕이라고 하는 묘령의 아가씨가 움막에 묵으며 기도하였다. 그러자 인근 재력가의 자제인 정혜도령이 그에게 청혼하였다. 그는 절을 지어주면 혼인하겠다고 하였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 전날 밤에 정혜가 그에게 혼례를 올리고 신방을 차리자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정혜에게 몸단장을 하고 나올 터이니 자기가 거처하는 움막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기다리다 지친 정혜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그가 바위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에 그를 잡았으나 다 잡지 못하고 그의 버선만 잡았다. 그는 버선만 남긴 채 바위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후로 바위틈에서 버선 모양의 꽃이 핀다. 이를 버선꽃또는 ‘골담라고 한다.

   홍순목 씨가 구연한 내용 역시 앞 이야기와 기본 줄거리는 같다. 그러나 남주인공을 부자 정혜대신 목수 덕숭도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덕숭이 마음 깊이 사랑하고 흠모하였던 그를 잃은 뒤에 세상에 나가 결혼하지 않고 정혜사에서 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있다. 남주인공의 이름을 앞 이야기에서 정혜라고 한 것은 대웅전 뒤편에 정혜사가 있는 것과 관련이 있고, 뒷이야기에서 덕숭이라고 한 것은 수덕사가 있는 산이 덕숭산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심이 두터운 수덕은 이곳에 절을 짓겠다는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불공드리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인다. 그의 미모에 반한 많은 남자들이 청혼을 하자, 그는 이곳에 절을 지어주는 사람과 혼인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앞 이야기에서는 부자인 정혜, 뒷이야기에서는 재능이 있는 목수 덕숭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절이 완공되기 하루 전날 밤에 정혼자가 그에게 혼인예식을 올리고 신방을 차리자고 제안한다. 그는 이를 뿌리치고 버선만 남긴 채 바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절은 완공되었지만, 많은 돈과 시간과 노동력을 바친 총각은 실망과 좌절을 안게 된다.

   이야기의 겉면만 보면, 수덕은 자기의 미모를 이용하여 정혜의 재물이나 덕숭의 기술과 노력을 절을 짓는 데에 모두 바치게 한다. 그리고는 절이 완공되자 혼인 약속을 저버린 채 사라져버린 거짓말쟁이로, 사기성이 농후한 나쁜 여인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수덕은 불심보다는 여인의 미모를 탐하는 마음이 더 큰 정혜나 덕숭으로 하여금 탐심을 버리고 자기가 가진 재물이나 기술·노동력을 불심을 닦는 도량을 짓는 데에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덕숭으로 하여금 불도에 귀의하여 진정한 도를 깨우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수덕은 자기의 미모를 이용하여 보시와 각성의 도를 가르친 신앙의 여인이라 하겠다. 수덕을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보는 것 역시 같은 해석이라 하겠다.

   관음암을 버선꽃과 관련지으며 다시 보니, 별 생각 없이 그 앞을 지나다닌 젊은 날의 발걸음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버선꽃이 필 때 다시 찾아와서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2024. 6. 3.)

                     대웅전 뒤편에 있는 관음암.  위쪽에 골담초(일명 버선꽃) 가지가 보인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 경내에 피어 있는 골담초. 일명 버선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