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로 받은 지팡이
얼마 전에 교회에서 예배 끝날 무렵에 목사님께서 “이 장로님이 나이 드신 분들께 드리려고 지팡이를 가져오셨으니, 필요하신 분은 받아 가십시오”라고 광고하셨다. 나와 아내는 언덕이나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에 지팡이를 짚으면 훨씬 편하다. 그래서 산에 갈 때에는 등산용 지팡이를 꼭 가지고 간다. 그러나 평지에서는 지팡이가 없어도 괜찮으므로, 지팡이를 달라고 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다가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준비해 두자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어, 이 장로님께 말씀드려 둘이 하나씩 받아가지고 왔다.
지팡이는 이 장로님이 경영하시는 ‘현대의료산업’에서 고령자용으로 만든 제품이다. 플라스틱 손잡이에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든 대를 고정시켰고, 길이는 쓰는 사람이 신장에 맞춰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국가통합인증마크(KC)를 획득한 제품으로, 안전 동작 하중은 100kg이다. 나이 든 교인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안전하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지팡이를 선물로 주신 이 장로님께 마음 깊이 감사한다.
지팡이는 노약자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걷거나 서 있을 때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보조기구이다. 지팡이는 본인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넌지시 도움을 청하는 역할도 한다. 특히 시각장애인의 흰 지팡이는 혼자 걸을 때 더듬이 역할을 하여 보행의 안전을 기하게 하며, 타인에게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해 준다.
지팡이가 보행의 보조기구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지팡이는 유목민의 목자에게는 양떼를 인도할 때 쓰는 도구이다. 마법사에게는 마법을 행할 때 꼭 있어야 하는 소품이다. 장로나 족장, 스님, 도인과 같은 사람에게는 권위의 상징물이다. 특히 스님에게는 걸을 때에 도움을 주는 도구이면서 법문(法問, 불법에 대하여 묻고 대답함)할 때나 좌선(坐禪, 고요히 앉아서 참선함)할 때, 그리고 경책(警策, 주의가 산만하거나 조는 사람을 깨우침)할 때에도 손에서 놓지 않는 도반(道伴)이다.
어떤 사물이 바로 서려면 최소한 세 개의 다리가 있어야 한다. 삼발이도, 세발솥의 다리도 셋이다. 사진기를 받치는 삼각대 역시 다리가 셋이다. 지게를 세울 때에는 작대기로 받쳐서 세 발이 되게 해야 한다. 이 원리는 사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Sphinx,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날개가 돋친 사자의 모습)는 바위산 길목에서, 행인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면 죽이곤 한다. 어느 날, 스핑크스는 이곳을 지나던 오이디푸스(Oedipus)에게 “목소리는 하나인데, 네 다리, 두 다리, 세 다리로 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오이디푸스가 “그것은 인간이다.”라고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분노를 내뿜으며 절벽으로 떨어져 죽고, 오이디푸스는 괴물을 물리친 영웅이 된다. 이 수수께끼는 삶의 여정을 말해 주는 것으로, 어린아이 때 네 발로 기는 것처럼 나이든 뒤에 지팡이를 짚는 것도 순리임을 일깨워 준다.
지인 중에 보행이 불편한데도 지팡이를 짚지 않으려 하는 분이 있다. 늙게 보여서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나이든 사람이 조심할 일 중 가장 큰 것이 낙상(落傷)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다. 노인은 낙상하면 골절하기 쉽고, 골절로 병상에 눕게 되면 온갖 병이 몰려와서 다시는 땅에 서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종합병원 입원 환자의 절반이 노인이고, 그 절반이 낙상환자라고 한다. 낙상사고를 당한 뒤에 지팡이를 짚지 않은 것을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나이 들어서도 젊어 보이려고 지팡이를 짚지 않는 것은 허세일 뿐이다.
나는 금년에 한국 나이로 팔순이 되었다. 이 장로님한테서 선물로 받은 지팡이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보행이 불편하다 싶으면 꺼내어 짚어야겠다. 지팡이를 짚는데 따르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부실한 다리에 쏠리는 체중을 분산시켜 주므로 무릎이 덜 아플 것이다. 그리고 걷다가 지치면 의지해서 잠시 쉬면서 자연과 인생을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걷게 되어 손도 마음도 허전할 때 지팡이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자리를 양보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따지며 눈치를 보던 사람도 ‘보행이 불편한 어른’으로 보고,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이다. 나이든 것이 큰 벼슬은 아니어도, 그 정도 대접은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70세 이상의 원로대신들에게 임금이 궤장(几杖, 벽에 세워 놓고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을 내렸다. 이때 임금이 주는 지팡이는 명아주로 만든 청려장(靑藜杖)이었다. 명아주는 밭이나 들에서 자라는 한해살이 풀이다. 어린 싹은 봄날에 나물로 먹고, 다 자란 뒤에는 지팡이를 만든다. 명아주는 줄기가 가볍고 단단하며, 손에 쥐는 느낌이 좋고, 구불구불 생긴 모습이 멋스러워 예로부터 지팡이의 재료로 쓰여 왔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에 걸리지 않고, 신경통이 좋아진다고 해서 귀한 지팡이로 여겼다고 한다. 청려장의 표면이 손바닥을 자극하여 뇌에 자극을 주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데 청려장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지팡이를 만들만큼 한 해 동안 크게 자라는 명아주를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자연산 명아주 대신 재배한 명아주로 청려장을 만든다. (대표적인 산지는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임.) 지금 남아 있는 청려장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퇴계 선생이 사용하던 것으로, 도산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10월 2일은 ‘노인의 날’이다. 유엔이 정한 노인의 날인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어서 하루 뒤인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정하여, 1997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이날 정부에서는 100세가 된 노인에게 청려장를 주어 축하한다. 이것은 전에 임금님이 원로대신에게 내리던 청려장 못지않게 영광스러운 선물이다. 나는 이 청려장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까? 이 장로님한테 받은 지팡이를 짚으면서 열심히 걸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 장로님이 주신 지팡이는 나를 청려장 받는 날까지 건강으로 이끌어 갈 매우 귀한 선물이다. 뜻깊은 지팡이를 선물로 주신 이 장로님께 감사하며, 사업이 크게 번창하기를 기도한다. (2021. 3. 1.) 《청하문학》 제20호, 서울: 청하문학회, 2021,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