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이 둘인 공양왕
며칠 전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고려 제34대 공양왕릉(恭讓王陵)을 찾았다. 이 능은 쌍릉 형식이며, 두 봉분 앞에 ‘고려 공양왕’, ‘순비 노씨(順妃盧氏)’라는 묘표가 있다. 두 봉분 앞 가운데에 조선 고종 때 세운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란 표석이 있고, 그 앞에 석등과 석호·문인석·무인석이 서 있다. 조금 더 앞에는 ‘개와 먹이그릇’ 석상이 있고, 아래쪽에 작은 연못이 있다. 이 능은 《조선왕조실록》, 《고양군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1970년 2월 28일에 사적 191호로 지정되었다. 고양시 향토문화보존회에서는 고양시의 지원을 받아 매년 공양왕고릉제를 봉행하고 있다. 왕릉 뒤에는 공양왕의 외손인 정(鄭)씨와 신(申)씨의 무덤들이 있다.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도 있다. 석축으로 굽을 돌린 무덤 세 기 중 큰 것은 공양왕의 능이고, 작은 것은 두 아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공양왕은 삼척에서 교살되어 이곳에 묻혔다가 고양으로 옮겨갔다고도 한다. 이 무덤에 관하여는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다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척주지》와 철종 6년(1855)에 김구혁이 쓴 《척주선생안》에 기록되었다. 이 능은 조선 현종 3년 가을에 삼척 부사 이규현이 개축하였고, 그 뒤에 지방 유지들이 봉축(封築)하였다. 1995년 9월 18일에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3년마다 제를 올려 공양왕을 추모하고 있다.
고려 말에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중심의 개혁세력은,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고,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하고, 강릉과 강화로 쫓아냈다. 그리고 1389년에 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王瑤)를 왕위에 앉히니, 그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공양왕(1345~1394)은 왕손이긴 하지만, 왕위 승계에서 멀어진 지 오래인지라 왕위에 뜻을 두지 않고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가 45세 되었을 때, 개혁세력인 이성계 쪽에서 왕위에 오를 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그들의 강권을 뿌리치지 못해 왕위에 올랐다. 왕좌는 수년간 온갖 노력을 하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오르기 힘든 자리이다. 그런데 그는 뜻하지 않았는데도 절대 권력을 가진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비운의 시작이었다.
개혁세력은 전왕과 고려 충신들을 숙청하는 한편, 이성계의 공적을 선양하려 하였다. 이것이 명분과 민심을 얻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완성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일을 대신해 줄 해결사로 왕요를 선택하여 왕좌에 앉혔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을 보면, 신흥세력의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의 목을 베야 한다는 소(疏)를 올린다. 그러자 힘이 없는 공양왕은 이를 허락하여 왕명으로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공적을 기리는 교지를 내리고, 이성계를 고려 개국 공신인 배현경의 예로 중흥공신에 책록한다. 또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를 살해한 일도 적당히 얼버무려 매듭짓는다. 이처럼 개혁세력은 허울뿐인 공양왕의 왕명을 빙자(憑藉)하여 반대파들을 처단하였다. 이것은 자기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반대파를 척결하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음험한 계략이었다.
공양왕은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예감하고, 이성계와 동맹을 맺어 안전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예(司藝) 조용(趙庸)을 시켜 이성계와 맹약을 맺는 문서의 초안을 잡게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의 집으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이성계와 더불어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력을 굳히고, 장애물을 완전히 제거한 이성계는 1392년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되니, 공양왕은 토끼를 잡은 뒤의 사냥개 신세가 되었다. 그는 곧바로 폐위되었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 안치(安置)되었다가 두 아들과 함께 교살되었다.
개혁세력은 공양왕을 앞세워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고려 충신들을 제거하였다. 그런 뒤에 공양왕을 두 아들과 함께 죽여 제대로 된 무덤도 없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를 미안하게 생각한 조선 태종은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양에 있는 그의 무덤에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그 뒤에 세종은 안성의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어진(御眞)을 고양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에 이안(移安)하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가 공양왕을 이용만하고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려는 뜻에서 취한 조치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고양의 공양왕릉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공양왕은 개혁세력이 자신을 죽일 것을 예감하고, 몰래 궁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쳤다. 산속에서 불빛을 보고 찾아가 작은 절에 이르렀다. 그가 왕임을 알아차린 스님은 크게 놀라면서, 동쪽으로 십리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누각에 가 있으라고 하였다. 왕과 왕비는 그 누각에서 스님이 날라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여기에서 ‘식사동(食寺洞)’이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어느 날, 이웃사람이 보니 왕이 귀여워하던 청삽살개가 연못가에서 한참을 짖은 뒤에 물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히 여겨 연못의 물을 품고 보니, 왕과 왕비가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애석히 여겨 두 사람을 땅에 묻고,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충성과 의리를 지킨 개의 석상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공양왕의 비극적인 최후를 안타까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의문점을 풀어 준다. 첫째 이곳에 공양왕릉이 있게 된 내력을 설명해 준다. 둘째 다른 왕릉과 달리 문인석과 무인석 앞에 개의 석상을 세워놓은 까닭을 해명해 준다. 셋째 무덤 아래에 작은 연못이 있는 이유를 말해 준다.
권좌에 뜻이 없던 공양왕은 이성계 세력에 떠밀려 왕위에 올라 약 3년 동안 역성혁명을 꾀하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반대 세력을 척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악역을 마친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무덤이 둘인 것도 그의 비운을 말해 준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를 이용하던 세력도, 이용을 당한 그도 한줌의 흙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무상한 것이 정치권력이다. (2020.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