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성과 세마대
지난 10월 둘째 주에 아내와 함께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있는 독산성(禿山城)을 찾았다. 그 안에 세마대(洗馬臺)와 보적사(寶積寺)가 있다. 사적 140호로 지정된 이 성은 둘레가 약 3.6㎞인데, 현재 약 400m 정도의 성벽과 성문 다섯 곳이 남아 있다. 백제 시대에 쌓은 이 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것을 계기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늦은 나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의주목사로 있던 권율은 선조 25(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 자리를 옮겼다. 임금이 북으로 피난을 떠나고, 한양 도성이 함락되자, 전라도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 휘하에 있던 권율은 한양 수복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이 수원과 용인에서 무모한 공격을 하다가 대패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에 돌아온 권율은 지원병을 모집하여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다가 금산의 이치(梨峙)에서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일본 정예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그 공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한 그는 일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북진하던 중 독산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권율은 훈련도 되지 않았고, 전투 경험도 부족한 군사를 이끌고 공격적인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독산성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성을 지키며 지구전을 펼쳤다. 일본군 총사령관은 후방이 차단되어 남방의 일본군과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독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독산성을 포위한 가토오 기요마사는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을 알고, 성안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끊은 뒤에 물 한 지게를 성안으로 들여보내며 조롱하였다.
왜군의 의도를 꿰뚫어 본 권율 장군은 군사들을 조련하는 한편, 병사들에게 가장 높은 곳에 백마를 세워놓고서 흰 쌀을 끼얹으라 하였다. 멀리서 이를 지켜본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기는커녕 말을 씻길 만큼 넉넉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기가 꺾인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그는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수많은 왜병을 살상하였다. 권율 장군이 독산성에서 승리하자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각 지역의 의병들이 권율 장군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기세를 업은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으로 옮겨가서 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이 그 유명한 행주대첩(1593)이다.
중국 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무(孫武)는 《손자병법》에서 ‘전쟁은 속임수[兵者詭道也]’라고 하였다. 그의 후손인 손빈(孫矉)은 《손자병법 36계》에서 ‘무중생유(無中生有, 없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냄)’, ‘수상개화(樹上開花, 나무에 꽃을 피게 함)’의 전술을 말하였다. 왜군을 속여 스스로 물러나게 한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고도의 심리전으로, 손자병법의 계책을 능가하는 지혜로운 전술이었다. 왜군이 물러간 다음에 선조는 이곳에 ‘세마대’라는 장대를 지어 독산성의 승리를 기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만전술은 해전에서도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유달산 노적봉의 바위를 이엉으로 덮어서 노적가리처럼 꾸몄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 주위를 계속 돌라고 하여 마치 대군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 영산강에 백토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였다. 이를 본 왜적들은 조선군은 군세가 대단하고, 군량이 넉넉한 것으로 알고 후퇴하였다고 한다. 당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문화예술로 승화되어, ‘강강술래’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1954년에 발행된 초등학교 국어 3-2 교과서에 <8. 노적봉과 영산강>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으므로, 나이든 사람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독산성이 도성 수비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중인 선조 27년(1594)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은 이 성을 고쳐 쌓았고, 임란 후인 선조 35년(1602)에 방어사 변응성은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 장마 때문에 독산성에서 하루를 묵고 갔다. 그로부터 30년 뒤 풍수지리 문제로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났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를 무시하고, 정조 16년(1792)에 새로 짓는 것과 비슷하게 큰 규모로 공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독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장대는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지금 보는 팔작지붕의 세마대는 195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세마대의 남쪽과 북쪽에 ‘洗馬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중 남쪽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필적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독산성 동문 안의 세마대 동쪽에는 보적사가 있다. 이 절은 백제 아신왕 10년(401)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절에는 “옛날에 노부부가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죽기로 결심하고, 남아 있는 쌀 두 되를 부처님께 공양하고 기도한 뒤에 집에 돌아와 보니, 곳간에 쌀이 가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 있는 절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절 이름을 ‘보적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나는 세마대와 보적사를 둘러본 뒤에 동문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오산, 수원, 화성에 걸쳐 펼쳐진 평야의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위에 있어 사면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군사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이 성은 전략적 요충지인 것을 알겠다.
독산성에서 보인 권율 장군의 세마전술은 보통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 지혜에서 나온 고도의 지략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문신으로 출사한 권율이 장군의 칭호를 얻고,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전략과 전술, 원만한 대인관계, 탁월한 지도력 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런 인물은 현대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지도자가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2020.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