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나지 않는 무덤
금년 봄은 코로나19 감염증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을 걷거나, 집 뒤에 있는 금호산을 거쳐 매봉산 팔각정까지 다녀오는 일 외에는 현관문을 나서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 답답한 생활이 두 달째 계속되다 보니,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한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이 적게 모이고, 멀지 않은 곳으로,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못한 곳이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때 문득 떠오른 곳이 최영 장군 묘다. 내 고향인 충남 홍성에 ‘최영 장군 활터’가 있고, 애마인 ‘금말’이 화살보다 늦게 달린 줄 알고 목을 벤 직후에 자기의 실수인 것을 알고 울면서 말을 묻었다는 ‘금마총(金馬塚)’이 있다. 그리고 최영 장군의 사당인 기봉사(奇峰祀)가 있다. 나는 이런 곳은 찾아가 보았으나, 묘는 찾아보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터라 이곳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지난 4월 2일 오전에 아내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를 찾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최영 장군 묘소 입구’라고 쓴 표석에 표시된 방향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길 좌우에 몇 그루씩 모여서 피어 있는 진달래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곳을 둘러보는 동안 7~8명의 탐방객도 보았다. 외출을 자제하는 이때에 최영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찾아오는 분들이 있는 것이 귀하게 여겨졌다.
장군 묘는 단분(單墳)으로, 부인 문화 유씨와 합장한 묘였다. 곡장(曲墻)을 두른 봉분의 바로 앞에는 혼유석(魂遊石)ㆍ상석ㆍ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와 뒤쪽에 묘비가 하나씩 서 있다. 묘비 앞에는 망주석과 문인석 각 한 쌍이 배열되어 있다. 이 묘의 뒤편의 한 계단 위에는 장군의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가 있다.
최영(1316~1388) 장군은 동주(凍州, 강원도 철원의 옛 이름) 최씨로,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고 하기도 하고,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고 하기도 한다. 그는 공민왕 1(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고, 1358년 400여 척의 배를 타고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것을 비롯하여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1361년에는 개경까지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고 수도를 수복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래서 고려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1384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가 되었다. 명나라가 청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그 이북, 이서, 이동의 땅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개성에서 이성계 일파에게 붙잡혔다. 이후 고양ㆍ마산ㆍ충주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1388년에 개성에서 처형되어 이곳에 안장되었다.
최영 장군은 고려를 지키지 못한 한을 품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처형당할 때 ‘만약 내가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그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 것은, 그가 사심이 없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묘에는 1970년대까지 풀이 나지 않았으나, 호우로 인한 흙의 유실을 염려한 후손들이, 흙과 잔디를 계속 갈아줘서 1976년부터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600여 년이 지나서야 원한이 풀려서 풀이 자라게 되었나 보다.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던 민중들은 그를 추앙하는 마음과 그가 생전에 이룬 영웅적인 업적이 뒤엉키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 그를 신격화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군의 위패와 초상을 모시는 집을 짓고, 영검한 신으로 받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개성 덕물산의 장군당을 비롯하여 충남 홍성 홍북면 노은리,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경남 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등에 사당이 생겼다. 전국의 강신무(降神巫)들은 내림굿을 할 때 대부분 최영(최일이라고도 함) 장군신이 내린다고 한다.
무당에게 내리는 인격신(人格神)은 김부 대왕신(신라 경순왕), 최영 장군신, 남이 장군신, 임경업 장군신 등 원한을 품고 죽은 인물들이다. 그 중 최영 장군신의 영검이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이것은 민중의 한과 기대와 열망이 크게 응집된 때문이라 하겠다. 무당에게 내린 최영 장군신은 그 무당의 몸주(무당의 몸에 처음으로 내린 신. 무당은 그 신을 주신으로 모신다)가 되어 가장 낮은 곳․아픈 곳․어두운 곳에 있는 서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능을 해 왔다.
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방해가 되는 최영을 반역자로 몰아 처형하였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지 6년 만에 최영 장군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다. 이성계도 최영의 사심 없는 충성심만은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평생의 생활신조로 삼고, 이를 실천하며 청렴개결(淸廉介潔)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최영 장군 부자의 묘가 있는 대자산 주변에는 조선 왕족들의 묘가 여럿 있다. 장군의 묘 아래쪽에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種, 태종의 4남, 세종대왕의 동생), 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 인조의 손자, 소현세자의 3남),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 인조의 증손, 경안군의 장남), 임성군(臨城君) 이엽(李熀, 경안군의 차남, 임창군의 동생)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건너편 산에 경혜공주(敬惠公主, 문종의 장녀, 단종의 누이) 내외와 성종의 서자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의 묘가 있다. 조선 왕족들이 최영 장군을 호위하고 있는 것 같아 아이러니하다.
나는 최영 장군의 묘를 살펴보고 내려오면서 최영 장군이 지은 시조를 읊조려 보았다. “녹이상제(綠駬霜蹄, 빠르고 좋은 말. ‘녹이’와 ‘상제’는 모두 중국 주나라 목왕이 타던 준마)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설악(龍泉雪鍔, 용천은 보검의 이름이고, 설악은 날카로운 칼날)을 들게 갈아 둘러메고/ 장부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을 세워 볼가 하노라.” 이 시는 장군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패기를 느끼게 한다.
지금은 최영 장군 같이 사심 없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일신을 바칠 각오를 가진 패기 있는 인물의 출현이 기대되는 시기이다. 하루 속히 코로나 감염병 사태가 진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최영 장군 묘소를 참배하면서 장군을 추모하고, 애국정신을 본받았으면 좋겠다.(2020.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