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산문

스님이 된 제자 상봉

의재 2019. 7. 19. 21:19

   지난주에 경남 고성군 하이면의 와룡산 낙서암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을 만났다. 그와 나는 오래 전에 사제의 연을 맺은 사이이다. 그동안 만나고 싶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며 몇 년을 흘려보냈다. 그것은 먼 곳까지 갈 시간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교 신자도 아닌 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가한 스님을 만나는 일이 수행(修行)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저어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미루다가는 아주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냈다.

 

   그와 어렵사리 통화하여 만날 날을 정한 뒤에 조용히 앉아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였다. 그는 45년 전, 내가 서울에 있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담임했던 반의 학생이다. 그는 근면 ·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지도력도 있는 학생이었다. 그는 나를 잘 따랐고, 2학년 때와 3학년 때에 반장으로 반을 잘 이끌었다. 반장 역할을 잘 하여 담임교사인 내가 자질구레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도록 해주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였다. 꽃을 좋아하는 그는, 우리 집에 올 때에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용돈이 부족할 터인데도, 꽃다발이나 작은 화분을 사서 들고 왔다. 시를 좋아하는 그는 2학년 때부터 시를 써서 보여주곤 하더니, 3학년 때에는 《잎을 모아서》라는 시 모음집을 들고 왔다. 펜으로 꼬박꼬박 눌러 쓴 시 모음집에는 따뜻하고 고운 마음을 담은 시들이 가득하였다. 나는 국어과 교사로, 시를 읽고 써보라고 권장은 하였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시 쓰기 지도는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였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 대광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나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그가 기독교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그가 대학에 진학하는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소식을 알 길이 없어 답답하였다. 얼마 뒤에 그가 긴 글을 보냈는데, 세상을 비관하고, 모든 인연이 끝이라고 하는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 편지가 유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하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데 편지 맨 끝에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겠습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궁금한 마음은 금할 수 없었다.

 

   몇 년 뒤에 다시 편지가 왔다. 출가하여 행자(行者) 노릇을 한 뒤에 승가대학을 마치고, 계(戒)를 받아 스님이 되었다며 법명(法名)을 적어 보냈다. 얼마 뒤에는 군에 입대하여 군종사병으로 근무하다가 휴가 나왔다면서 내가 근무하는 대학으로 찾아왔다. 그날 간단히 식사를 하고 헤어진 뒤로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1984년에는 잎을 모아서 제2집을 보내왔다. 군 생활 3년 동안 쓴 작품들을 타자기로 쓴 시 모음집이었다. 맨 뒷면에 ‘스승님의 은덕을 기리며—제자 000 드림’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 나는 그가 수행의 정도가 깊어지면서 나를 잊은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죽로차(竹露茶) 한 통을 보내왔다. 그 통 속에는 ‘스님들이 마시려고 댓잎에 맺힌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을 따서 만든 차’라는 쪽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가 나와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였다. 이 일로 나는 녹차의 맛을 알게 되었다.

 

   또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던 그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하여 시 공부를 한 뒤에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시집도 출판했다면서 시집 出出家를 보내왔다. 그 뒤에는 한동안 선원(禪院)에 들어가 참선(參禪)하였고, 태국에 가서 1년 동안 수행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얼마 뒤에는 낙서암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과 함께 그 동안 사찰을 옮겨 다니느라 자주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 뒤로는 매년 스승의 날이면 녹차를 선물로 보내왔다. 나는 그에게 나의 정년기념문집과 수필집 등을 보내 근황을 알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승용차를 몰고 5시간을 달려 고성의 약속 장소에 가니, 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복 입은 모습을 본 뒤로 35년만의 상봉이다. 반갑고 떨리는 마음으로 악수를 하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곱던 얼굴과 천진하던 표정은 온화하고, 너그러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환갑을 맞이한 스님답게 긴 세월 수행하여 얻은 고상한 품격이 보였다. 마주 앉아 그동안 지내온 일과 근황을 이야기하다 보니 아주 정겹고, 흐뭇하였다. 함께 간 아내와 김 교수 내외가 옆에서 거드는 바람에 분위기는 더욱 훈훈하였다. 기독교인인 나는 그와 종교가 달랐지만, 전에 맺은 인연의 끈이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감싸 주었다.

 

   한 시간쯤 대화하던 우리는 차에 올라 그가 홀로 수행하고 있는 낙서암으로 향하였다. 와룡산 중턱에 있는 천진암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경사가 심한 데다가 바위와 돌이 많아 걷기 힘든 길이었다. 김 교수 내외는 그를 잘 따라 올라갔지만, 나와 아내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었다. 아내는 끝내 오르기를 포기하였고, 나는 30분 이상 걸려 낙서암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렇게 힘든 길을, 필요한 물건을 등에 지고 오르내린다고 하였다. 이 길을 걸어 암자에 오르는 일만도 고된 수행이라 하겠다.

 

   와룡산 향로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낙서암의 풍광(風光)은 아주 좋았다. 뜰에 활짝 피어 있는 흰색․보라색 수국을 비롯한 여러 꽃과 나무들은 이 암자의 분위기를 아주 안정되고, 고즈넉하게 하였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에 그가 거처하는 산방(山房)에 들어가 보았다. 잘 정돈된 방에는 책이 쌓여 있고, 그 옆에는 LP판이 가득 꽂힌 장과 턴테이블(turntable)이 놓여 있다. 선(禪)과 음악 감상은 마음을 닦는 데에 상승작용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보니, 멀리 보이는 남해바다와 그 앞의 산들이 조화를 이루어 조망이 환상적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마음을 닦고, 음악을 들으며 시상을 가다듬어 시를 쓰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아주 고상하고 멋스럽게 느껴진다. 깊은 산속에서 혼자 지내며 수행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닌 것 같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본 나는 하산을 서둘렀다. 나는 그가 우리를 배웅하러 산을 내려갔다가 비를 맞으며 올라올 일을 걱정하며 낙서암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산을 내려가 식사대접을 하겠다며 앞장서서 내려갔다. 우리는 천진암으로 와서 차를 타고 연꽃단지 앞에 있는 식당 <연담>으로 가서 연잎정식을 먹으며 담소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다시 차를 타고 천진암으로 와서 작별하였다. 그가 잡아준 숙소로 돌아와 그가 준 시집 산색(山色)과 선물꾸러미(죽로차와 황진단)를 열어보니, 45년 전에 맺은 인연의 끈이 예쁘게 서려 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연꽃단지에서 본 ‘이제염오(離諸染汚)’란 말을 넣어 기원하였다. 진흙탕에서 자라는 연꽃이 진흙에 물들지 않고 예쁜 꽃을 피우듯이 주변의 환경이나 부조리에 물들지 말고 정진(精進)하여 덕이 높은 스님이 되소서!(2019. 0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