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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절미의 유래

의재 2017. 11. 28. 12:49

우리나라에는 떡의 종류가 참으로 많다. 그 많은 떡 중에서 나는 인절미를 제일 좋아한다. 내가 인절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객지 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내 생일에는 꼭 인절미를 해 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생활이 어려울 때에도 내 생일에는 빠지지 않고 인절미를 해 주셨다. 결혼한 뒤에는 이를 아는 아내가 생일에 잊지 않고 인절미를 해 준다. 전에는 꼭 집에서 만들었으나, 요즈음에는 떡집에서 사 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인절미는 자연스레 내 생일떡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절미를 먹어야 생일을 제대로 지낸 기분이 든다. 올해도 생일날 아침 식탁에 여러 음식과 함께 인절미가 올라왔다.

 

인절미는 잘 불린 찹쌀을 쪄서 안반(떡을 칠 때에 쓰는 두껍고 넓은 나무 판)이나 절구에 담고 떡메로 친 다음, 네모나게 썰어 고물을 묻혀 만든다. 주재료가 찹쌀이므로, 멥쌀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 찹쌀이어야 차지고 보드랍다. 쪄낸 지에밥(찹쌀이나 멥쌀을 물에 불려서 시루에 찐 밥)은 질지 않아야 한다. 지에밥을 안반이나 절구에 넣고 힘 있게, 오래 쳐서 밥알이 흔적 없이 으깨어져야 한다. 지에밥을 메로 칠 때 살짝 데친 연한 쑥을 같이 넣으면 쑥의 향기가 좋고 색도 곱다. 잘 친 것을 젖은 도마 위에 놓고 길게 늘인 뒤에 적당한 크기로 썰어 갖은 고물을 묻힌다. 고물로는 노란 콩이나 파란 콩을 볶아 만든 콩고물, 껍질을 벗긴 팥녹두 등을 쪄서 어레미에 내린 팥고물과 녹두고물, 흰깨 또는 검정깨고물 등을 쓴다. 인절미는 고물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른데, 나는 콩고물 인절미를 가장 좋아한다. 인절미의 모양은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남쪽에서는 작고 맵시 있게 만드는데 비하여 북쪽에서는 크고 소담하게 만든다.

 

현대에 와서 인절미는 한국의 떡을 대표한다고 할 만큼 널리 퍼졌다. 그에 따라 인절미는 속담이나 관용구에도 오르내린다. 온통 더버기(한군데에 무더기로 쌓이거나 덕지덕지 붙은 상태)로 뒤집어쓰거나 씌우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 인절미 팥고물 묻히듯이란 말을 많이 쓴다. 구미에 딱 맞고 마음에 드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는 인절미에 조청 찍은 맛이라고 한다. 인절미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돌면서, 먹고 싶어진다.

 

우리나라에서 떡을 언제부터 만들어 먹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원시농경을 시작하던 때부터 먹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유리왕 조에는 []을 물어 잇자국을 시험하였더니, 유리의 잇금이 많았다. 이를 본 군신들이 유리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제2대 남해왕의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 중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를 논의할 때, 탈해가 지혜가 많은 사람은 잇금이 많다고 하니, 잇금이 많은 사람이 왕위를 잇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떡을 물어 시험하였더니, 유리의 잇금이 더 많았으므로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수 있는 떡이라면 인절미나 절편과 같은 떡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절미는 한자로 引切餠(인절병),印切餠(인절병),引截米(인절미)’, 또는 粉餈(분자)라고 적었다. 앞의 것은 잡아 당겨 자르는 떡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인절미에 대한 문헌 기록을 보면, 중국의 주례(周禮)에는 인절미가 떡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였다.고려사(高麗史)에는 粉餈(분자, 인절미)白餠(백병, 쌀떡), 黑餠(흑병, 수수떡), 酏食(이식, 술떡) 등과 함께 종묘대제(宗廟大祭)에 올리는 떡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종묘대제에서도 역시 인절미를 제상에 올렸다. 조선 영조 때 유중임이 엮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콩고물을 묻힌 인절미가 기록되어 있다. 1795(정조 19)에 정조가 연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팥고물을 묻힌 대추인절미와 잣가루고물을 묻힌 석이인절미, 깨고물을 묻힌 건시인절미가 나온다. 1809(순조 9)에 빙허각(憑虛閣) 이씨가 엮은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인절미 만드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이런 기록은 인절미가 고려 시대부터 지금까지 만들어 먹는 떡임을 말해 준다.

 

우리나라의 각 지방에는 제주 오메기떡, 의령 망개떡처럼 그 지역과 관련이 있는 떡을 내세워 자랑하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에서는 인절미를 공주떡이라고 하여 크게 자랑한다. 그 이유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공주에는 백제 때 쌓은 성인 공산성(公山城)이 있다. 공산성의 진남루(鎭南樓)에서 금서루(錦西樓) 쪽으로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쌍수정(雙樹亭)과 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가 있다. 그 옆에 인절미의 고향 공주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에는 인절미라는 이름이 붙여진 내력이 적혀 있다. 서기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 온 조선 16대 인조 임금은 이곳에 서 있던 두 그루의 나무[雙樹] 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 그 때 공주시 우성면 목천리에 사는 임()씨가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進上)하였다. 왕은 시장한 참에 연거푸 몇 개를 먹고 나서, 떡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러나 떡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왕은 맛있는 떡을 임씨가 진상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 맛이 빼어나 절미(絶味, 뛰어난 맛)이니, ‘임절미(任絶味)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임절미는 발음하기 편하게 인절미로 바뀌고, 공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서 공주떡이 되었다.

 

  쌍수정사적비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간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이 비는 1708(숙종 34)년에 세운 것인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여기에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에 온 인조가 공산성에 있는 두 나무에 의지하여 6일을 지낸 일, 반란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가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쌍수(雙樹)에 정삼품의 작위(爵位) 내리고, 한양으로 돌아간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충청관찰사로 부임한 이수항은 1734(영조10) 인조를 기리는 뜻에서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쌍수정을 지었다.

 

  이로 보아 인조의 공주 피난은 역사적 사실임이 틀림없다. 인조가 피난지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난을 겪을 때 진상 받은 인절미의 맛은 정말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맛을 빼어난 맛절미(絶味)라고 하고, 임씨가 진상하였으니 임절미라고 하였다고 한다. 사물의 이름 중에는 역사적 사실과 연관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민간어원(民間語源)도 있다. 인절미의 경우는 인조의 공주 피난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으니, 개연성(蓋然性)이 있어 보인다. 인절미는 오래 전부터 만들어 먹던 떡이니, 그 전에도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진 이름이 있었다하더라도 인조 임금과 관련된 이름인 인절미가 전의 이름을 누르고 널리 퍼졌을 것이다. 그래서 인절미는 한국의 떡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공주와 부여 지방에서는 해마다 백제문화제가 열린다. 2015926일부터 104일까지 열린 제61회 공주백제문화제에서는 여러 가지 축제 행사를 하였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929일 오후 3시에 공주시 금상동 금강교 앞 광장무대에서 열린 공주인절미 만들기행사이다. 이날 만든 인절미의 길이가 자그마치 610m나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행사는 공주 시민이나 관광객의 흥미와 관심을 끌고, 인절미를 공주의 떡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공주시에서는 특허청에 공주인절미의 지리적표시단체표장(지리적 표시를 상품에 붙이는 부호나 휘장) 출원(出願)하였다고 한다. 공주인절미의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켜 시장 경쟁력을 높이고, 유통망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공주인절미를 즐겨 먹으면서 인절미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도 알았으면 좋겠다.

 

요즈음 어린이들은 떡보다는 빵이나 케이크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동요 중에 인절미와 관련된 <인절미와 총각김치>가 있다.

 

여러분 인절미가 시집간대요./ 팥고물과 콩고물로 화장을 하고

동그란 쟁반 위에 올라앉아서/ 시집을 간다네. 입 속으로 쏙.

 

여러분 총각김치 장가간대요./ 새빨간 고춧물에 목욕을 하고

기다린 나무 위에 올라앉아서/ 장가를 간다네. 입 속으로 쏙.

 

이 동요를 들으면, 인절미를 총각김치와 곁들여 먹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 노래가 어린이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켜 빵보다 떡을 더 즐겨 먹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청하문학 제16, 서울: 청하문학회, 2017. 12.>

   

              이괄의 난을 피해 온 인조가 의지하였던 두 나무가 있던 자리에 지은 쌍수정 

           

 피난 온 인조의 행적과 공산성의 모습을 적은 쌍수정사적비 

                            쌍수정 아래에 있는 인절미의 고향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