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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 일 두 가지

의재 2017. 11. 28. 12:37

   올해 1022일을 맞는 나의 마음은 나도 모르게 숙연하다. 이 날은 내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결혼 5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기념일을 따지는 것은 서양의 문화라는 생각에서 지금까지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나 결혼 50주년을 맞고 보니, 매우 뜻 깊게 느껴진다. 그것은 50년이란 긴 세월을 아내와 함께 살아온 나의 삶의 무게와 소중함이 새삼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중히 여기는 회혼(回婚) 때까지 우리 부부가 건강하게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마음도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나와 아내는 결혼 50주년 기념으로 3남매의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해에 두 아들과 딸에게 201612월 겨울방학 때 함께 해외여행을 가자고 하였다. 아들과 딸, 손자 손녀가 모두 좋다고 하여 그대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내년에 대학에 진학해야 할 고등학교 2학년짜리 손녀의 학습 문제, 미국에 가 있는 딸과 사위의 영주권과 직장 문제, 작은아들의 이사 문제 등이 겹쳐 떠날 수 없게 되었다. 가족여행을 내년으로 미루고 보니,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둘이 국내여행을 하기로 하고, 10월에는 34일 일정으로 강원도 정선태백삼척 지역, 11월에는 45일의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하였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50년을 함께 사는 동안 겪은 기쁘고 즐거웠던 일, 보람 있고 행복했던 일, 힘들고 슬펐던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때의 일들은 우리의 삶을 한 단계씩 발전시키고, 성숙하게 해 주었던 것 같다.

 

   나와 아내는 서울교육대학교 동기동창이다. 대학에 다닐 때는 얼굴과 이름을 겨우 아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런 우리가 졸업 후에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홍파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함께 근무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 1년을 함께 근무한 뒤에 군에 입대하였는데,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하였다.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하던 해인 19661022일에 결혼하였다.

 

   나와 아내는 결혼한 뒤 50년 동안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아무 탈 없이 살아왔다. 작은 일로 다툰 적은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사랑을 더욱 돈독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고 하면서 본받을 만한 모범적인 부부라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이런 평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덕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내와 결혼한 것을 큰 복으로 여긴다. 내가 아내에게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만나고 싶다고 하니, 아내 역시 그렇다고 한다.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맙다.

 

   그 동안 아내의 수고와 고생은 너무나 커서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나는 아내에게 수고하였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늦게나마 아내의 수고를 치하하며 고마운 마음을 정리해 본다. 우리는 단간 전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아내는 결혼한 후 35년 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집안 살림을 하였다. 매사를 계획적으로 짜임새 있게 처리하면서 근검절약하니, 집안 형편은 조금씩 나아지게 되었다. 그 덕에 결혼 1년 후에 셋방 신세를 면하고, 작은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다. 그 뒤로는 형편이 되는 대로 집을 늘려 이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맨몸으로 서울에 올라온 내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아내가 알뜰하게 살림하고, 근검절약한 결과이다.

 

   나는 7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나, 위로 형님과 누님 셋,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형님을 잃고, 해군에서 제대한 남동생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외아들이 되었다. 아내는 일찍 홀로되신 어머니를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36년 동안 지성으로 모셨다. 그리고 여동생을 고등학교와 대학에 보내고, 졸업한 뒤에 시집을 보냈다. 그동안 아내가 겪은 마음고생과 수고로움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내색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가정의 평화를 지켜왔다.

 

   나는 3남매를 두었는데, 국문학을 전공한 큰아들은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딸은 음악을 전공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지금은 미국에 가서 살고 있다. 국문학을 전공한 작은아들은 대학원을 마치고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세 아이가 잘 자라 대학원까지 공부를 하고, 자립하여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내의 세심하고 정성스런 육아와 가정교육 덕이라 생각한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결혼한 뒤에 중학교 교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내가 야간대학에 편입학하여 공부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것, 교수가 된 뒤에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 덕이다. 아내는 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일과 경조사를 비롯한 친척 사이의 일을 도맡아 하였다. 아이들의 학습이나 생활지도에도 내가 마음을 쓰지 않도록 해 주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가 없었다면 나는 사회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이 75세로, 결혼 50주년을 맞은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돌이켜본다.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잘못하여 후회되는 일도 있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이 있는가 하면, 힘들고 슬펐던 일도 있다. 그 많은 일 중에서 내가 잘하였고,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서울교육대학에 진학한 일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2년만 공부하면 서울시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을 수 있으니, 빨리 졸업하고 취직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적으로 안정을 취한 후 어머님을 모시면서 야간대학에 진학하여 더 공부하라.”고 하시며 서울교육대학 진학을 권하셨다. 그래서 눈물을 삼키며 법조인이 되겠다던 꿈을 접고 서울교대에 진학하였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가난하기 짝이 없는 촌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아주 잘한 일이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내의 도움으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서울교육대학에 진학한 일과 아내와 결혼한 일은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글 쓰는 일에 열중한다. 주일에는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드린다. 시간이 되는 대로 아내와 함께 탁구를 하고, 공원을 걸으며 많은 대화를 한다. 틈이 나면 함께 연극이나 영화, 음악회나 전시회에 가서 감상하며 즐기고, 이름난 맛집도 찾아간다. 기회가 되는 대로 국내나 국외 여행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주말에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와 함께 식사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한다. 모든 일이 즐겁고, 감사하다. 나는 매일 부족한 나에게 좋은 배우자를 허락해 주시고, 노후를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성동문학 제17, 서울 : 성동문인협회, 2017.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