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의 연리지문(連理枝門)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은 여러 봉우리와 바위들이 조화를 이루어 경관이 빼어나므로, ‘경기의 소금강’이라는 별명이 붙은 산이다. 특히 진달래가 피는 4월과 단풍이 드는 10월은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0월의 마지막 날 교일산우회 남부모임 회원들과 함께 단풍이 곱게 물든 모습을 보기 위해 다시 소요산을 찾았다. 전철 1호선 소요산역에서 내려 소요산으로 가는 길은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소요산에는 신라의 고승(高僧)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와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搖石公主)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사랑과 소요산과의 인연을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한 문헌을 참조하여 본다.
신라 태종무열왕 때 고승으로 이름을 떨친 원효대사는 속성(俗姓)이 설(薛)씨이다. 수도에 전념하던 원효대사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게 하겠는가(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하고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이 노래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무열왕은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현인(賢人)을 낳고자 하는구나. 현인을 얻는 것은 나라의 큰 이득이다.” 하고, 관리를 시켜 대사를 찾아 홀로 된 요석공주가 살고 있는 요석궁(搖石宮)으로 모시고 가라고 하였다. 관리가 대사를 찾아다니는데, 그때 마침 다리를 건너던 대사가 미끄러져 물에 빠졌다. 관리는 대사를 요석궁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갈아입게 하였다. 대사는 요석궁에서 며칠을 묵은 후에 떠났다. 얼마 후 요석공주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설총(薛聰)이라 하였는데, 이 아이는 자라서 당대의 석학(碩學)이 되었다. 파계승(破戒僧)이 된 원효대사는 속인(俗人)의 옷을 입고 전국을 떠돌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중생(衆生)을 교화(敎化)다가 소요산에 와서 머물며 수행(修行)에 전념하였다. 대사가 소요산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요석공주는 설총을 데리고 이곳으로 와서 별궁을 짓고 살면서 수도하는 원효대사를 향해 매일 절을 올리곤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이곳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깃든 곳이기에, 입구에 이를 형상화한 ‘연리지문(連理枝門)’을 소요산 상징 아치(arch)로 세워 놓았다. 연리지(連理枝)는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을 말하는데,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아치의 왼쪽 원효목(元曉木)은 원각(圓覺)의 도를 깨우치기 위해 수도하는 원효대사를 형상화한 것이고, 오른쪽 요석목((搖石木)은 지순한 사랑을 품은 요석공주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소요산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와 연관 짓고, 이를 연리지문으로 형상화한 것은 아주 좋은 착상(着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연리지처럼 서로 화목하게 마음을 나누며 살았으면 좋겠다.
연리지문을 조금 지나 자재암(自在庵) 쪽으로 올라가니, 요석공원이 있고, 통행로 건너편에 '요석궁터' 표석이 있다. 나는 요석공원과 요석궁터 앞에 서서 파계(破戒)하여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던 원효의 모습, 며칠 동안 꽃피웠던 아름다운 사랑과 그 열매인 아들 설총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수도에만 전념하는 대사를 멀리서 바라보며 매일 예배(禮拜)를 올리는 요석공주의 단풍잎보다 더 곱고 예쁜 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이러한 공주의 지성과 사랑을 기리는 뜻에서 맨 오른쪽에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을 ‘공주봉(公主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봉우리 이름을 원효대사가 지었다고 전해 오기도 하는데,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주문을 지나 자재암으로 가려면 해탈문(解脫門)을 지나야 하는데, 108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나는 108계단을 오르면서 벗어나야 할 108번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눈, 귀, 코, 혀, 몸, 뜻(마음)의 여섯 감각기관이 사물을 접할 때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는 세 가지가 서로 같지 않아 18가지 번뇌를 일으킨다. 또 ‘괴로움/ 즐거움/ 그저 그런 것’과 관련지어 18가지 번뇌가 일어난다. 이들을 합친 36가지 번뇌가 다시 각각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 때문에 108가지 번뇌가 된다. 이러한 세속(世俗)의 백팔번뇌(百八煩惱)에서 벗어나야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나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으며 108계단을 오르고, 해탈문을 지났다.
해탈문을 지나니, 절벽위에 ‘원효대(元曉臺)’가 있다. 옛날에 원효대사가 도를 깨치지 못해 자살을 하려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하는 순간 문득 도를 깨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원효대에서 아래쪽을 보니, 단풍이 물들어가는 산자락의 모습이 장관이다. 고개를 돌려 산 쪽을 바라보니, 산줄기를 따라 잘 자란 나무들이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나는 이곳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오랜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도를 닦고, 절박한 마음으로 큰 깨우침을 구하던 원효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세상에서 벗어남을 뜻하는 속리교(俗離橋)을 지나고, 극락교(極樂橋)를 지나 자재암에 이르렀다.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초가를 짓고 수도하던 곳에 선덕여왕 14년(645)에 세운 절인데, 고려 광종 25년(974)에 각규대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의종 7년(1153)에 불에 탔는데, 이듬해에 다시 지었다. 조선 고종 9년(1872)에 다시 지었는데, 순종 원년에 불에 타고, 그 후 다시 지었으나 6․25전쟁 때 불에 탔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1961년에 다시 지은 것이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寮舍)는 1971년에, 포교당과 원효대는 1974년에, 삼성각은 1977년에 지은 것이다. 우리는 자재암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뒤에 원효약수에서 물을 마시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자재암 뒤에 만들어놓은 계단을 밟고 힘겹게 오르니, 해발 440m에 위치한 하백운대가 나왔다. 그곳에서 땀을 식히고, 백형이 가지고 온 찐 고구마로 시장요기를 하고, 다시 30분가량을 걸어 해발 510m에 위치한 중백운대에 도착하였다. 소요산은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해발 560.5m), 나한대((해발 571m), 의상대(해발 587m), 공주봉(해발 526m) 등 6개의 봉우리가 말발굽모양으로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거기서는 산봉우리들이 모두 보여 소요산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중백운대에서 상백운대쪽으로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선녀탕길을 따라 내려왔다. 상백운대까지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과로할 것 같아 자제하였다. 하산길은 가파르고 바위가 많아 지팡이를 짚고 조심조심 발을 옮겨야 했다. 그래서 매우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이날 우리가 택하여 걸은 등산코스는 일흔 살이 넘은 우리들이 걷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길이었다. 소요산 등산 안내서에 소요시간이 1시간 30분으로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믿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인데, 체력 면에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는 소요산에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숨결을 느끼며 걷는 길은 매우 뜻 깊고, 즐거웠다. 함께 한 회원들의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었기 바란다. (2014.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