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2011. 10. 3. 23:53

   넴루트산은 터키 남동부에 있는 해발 2,150m의 산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 아드야만(Adıyaman)에서 90km, 카흐타(Kahta)에서는 48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산의 원추형의 산 정상에는 기원전 1세기에 만든 직경 약 150m, 높이 약 50m인 콤마게네왕국 안티오코스왕의 능묘(陵墓)가 있고, 그 앞에 커다란 석상(石像)들이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이 넴루트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터키에는 넴루트산이 또 하나 있는데, 이 산은 동부아나톨리아 지역의 반 호수 근처에 있는 해발 2934m의 산이다.

  해발 2,150m나 되는 넴루트 산의 꼭대기에 큰 능묘와 석상들이 있는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한 왕은 어떤 인물일까콤마게네왕국이 있던 이 지역은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은 기원전 14세기경부터는 히타이트(Hittite)의 지배 아래 있었고, 기원전 546년부터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 뒤에 알렉산더대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 통치하였는데, 그가 기원전 323년에 요절(夭折)하자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각 지방에 군주를 두고 다스렸는데, 이곳 콤마게네 지방도 그 중 하나였다. 기원전 163년 콤마게네의 군주 사모스는 쇠약해진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이탈하여 콤마게네 왕국을 선포하였다. 사모스의 아들 미트리다데스 1세는 셀레우코스 왕조 최후의 왕인 안티오코스 13세의 딸과 결혼하고, ‘아버지는 페르시아 왕조, 어머니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적자에게 안티오코스란 이름을 계승하게 하였다. 그의 아들이 안티오코스 1(재위 B.C. 6931)인데, 콤마게네 왕국은 이 때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안티오코스 1세가 자기의 무덤과 석상을 넴루트산 꼭대기에 만들도록 하였다.

  넴루트 유적은 1881년에 오스만제국이 도로 건설을 하려고 독일인 기술자를 고용해 비용을 계산해 보게 하였는데, 그가 이 산의 정상에서 조각상을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그 후 1953년에 미국 동양연구소가 이곳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고고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정상의 능묘(陵墓)와 석상(石像)

  나는 20106월에 남동부의 아드야만에 있는 넴루트산에 가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아 가지 못하고, 20116월에야 장위교회 성지순례단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나는 621일 아침 730분에 버스를 타고 카파도키아에 있는 아브라샤(Avrasya) 호텔을 출발하여 카흐타(Kahta)로 향하였다.

  우리는 가는 도중에 테킬 계곡을 돌아보고, 카흐타를 시내를 지나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려 오후 5시경에 유프라트 넴루트 호텔(Euphrat Nemrut Hotel)에 도착하였다.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는 호텔의 시설이 좋지 않으니 양해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단층으로 지은 호텔은 지은 지가 오래되어 최신식 시설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깊은 산속에 있는 호텔답게 아담하고 조용하며 깨끗하였다. 수영장에는 맑은 물이 가득하였지만, 우리 일행은 수영보다는 건물 주변에 붉게 익은 체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체리나무들에 더 마음이 끌렸다. 체리를 따려고 하여도 손이 닿지 않아 애를 쓰자, 관리인은 막대기를 들고 와서 체리를 따주었다. 나무에서 직접 체리를 따서 먹는 맛은 정말 좋았다.

  내일 아침에 넴루트산 정상에 올라 일출을 보려면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하니, 일찍 자라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일찍 자리에 누었다. 그러나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잠이 깊이 들지 않고, 시계를 잘못 보는 바람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몹시 피곤하였다. 그러나 넴루트산에서 보는 일출의 장관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새벽 330분에 호텔을 나와 산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니, 작은 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몇 대의 차에 나눠 타니, 차는 산 정상 쪽으로 난 꼬불꼬불한 길을 곡예를 하듯 달려 올라갔다. 15분쯤 달려 올라간 뒤에 차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데다가 바위 사이로 난 길에 크고 작은 돌들이 많아 조심조심 걸어 올라갔다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시계를 보니, 435분이었다. 길 왼쪽(서쪽)에 안티오코스 능묘와 석상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길 오른쪽(동쪽)으로 올라가니, 평평한 넓은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기쁨이 넘쳐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과도 악수를 한 뒤에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 도 있었다. 모두 넴루트산에 와서 일출을 본다는 것이 기쁘고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나와 아내 역시 좀 흥분되고 긴장되었다. 마당에 서서 동쪽 하늘을 보니, 사방은 어둠에 덮여 있고, 해가 뜰 기미는 보이지 않는데, 바람이 차서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언덕 밑으로 와서 바람을 피하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새벽 5시 정각이 되자 저 멀리 동쪽의 타우르스산맥 너머에서 여명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1분쯤 뒤에 여명이 더 밝아지고, 잠시 후부터 해가 조금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모두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의 함성을 질렀다. 이 순간을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 캠코더의 스윗치를 누르고, 카메라의 샷터를 눌렀다. 나도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모습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다. 가끔씩 카메라의 뷰에서 눈을 떼어 둘러보니, 사방에 겹겹이 뻗혀 있는 산줄기와 산 아래의 평원에 여명이 비치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었다. 멀리 터키까지 와서, 2,150m나 되는 높은 넴루트산 정상에서 해가 뜨는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게 된 것이 정말 기쁘고, 흐뭇하며 감사하였다.

  잠시 후에 해가 모습을 모두 드러내면서 능묘와 신상들을 비추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능묘의 모양, 능묘 앞에 있는 제단과 신상(神像), 제단 아래에 놓여 있는 신상의 얼굴을 살펴보면서 사진을 찍었다햇빛이 비스듬히 비치는 능묘의 동쪽 제단에는 왼쪽부터 아폴론, 콤마게네, 제우스, 안티오코스 1, 헤라클레스의 상()이 서 있다. 양쪽 끝에는 사자와 독수리가 대칭으로 2쌍씩 서 있다. 석상의 안쪽에는 안티오코스의 출신 관련 내용과 유언을 새긴 그리스 문자가 새겨져 있다. 석상의 얼굴들은 지진의 충격으로 몸에서 떨어져 그 아래에 있다. 단정한 얼굴과 반쯤 열린 입은 헬레니즘 양식이고, 머리 장식의 장식과 의상은 페르시아 양식이라고 한다.

  여기에 세운 석상을 보면, 아폴론과 제우스는 그리스 로마에서 숭상되던 신이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웅인데, 신으로 추앙되던 인물이다. ‘콤마게네행운’, ‘풍요의 뜻을 가진 여신이다. 안티오코스 1세는 이러한 신들과 나란히 서 있다. 이것은 안티오코스 1세가 신들과 같은 반열(班列)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석상의 독수리는 태양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창조물로, 신과 인간의 중재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자는 가장 힘센 동물로, 왕국을 보호하는 수호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쪽의 제단과 신상들을 살펴본 뒤에 능묘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서쪽 제단 앞으로 갔다. 서쪽 제단에는 사자와 독수리, 안티오쿠스와 콤마게네, 안티오코스와 아폴로, 안티오코스와 제우스, 안티오코스와 헤라클레스, 아폴로, 콤마게네의 석상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 역시 지진의 충격으로 얼굴 부분이 몸에서 잘려 나와 아래쪽에 놓여 있다. 동쪽과 서쪽의 석상들과 부조를 보면, 동쪽은 안티오코스와 신을 각각 조각하였다. 그런데 서쪽에는 안티오코스와 신을 함께 조각하였다. 이것은 안티오코스왕이 신과 동격(同格)으로, 신들과 교류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커다란 사자 부조의 가슴에 있는 초승달은 콤마게네 왕국의 상징이다. 등 뒤에 있는 3개의 별은 목성, 수성, 화성이라고 한다. 동쪽과 서쪽 제단을 연결하는 북쪽 통로에 세로로 새긴 석판을 늘어놓은 낮은 벽이 있다. 여기에는 페르시아계 부친의 내력을 기술해 놓았다.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이 높은 산에 능묘와 신상을 만들어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콤마게네 사람들은 일찍부터 태양, , , 물을 신성시하여 신으로 받들어 모셨고, 뒤에는 산, 폭풍, 전쟁, 풍요의 신도 숭배하였다. 이들은 신을 경배하기 위해 신전(神殿)을 지었는데, 신들은 다 하늘에 있는 것으로 믿어 하늘에 가장 가까운 산에 신전을 만들었다. 안티오코스 1세가 해발 2,150m나 되는 넴루트 산의 꼭대기에 자신의 무덤과 신상을 만들게 한 것은 자신이 신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뜻에서이고, 그 뜻을 이루려면 하늘 가까운 높은 산에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티오코스 1세는 왕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린 뒤에 신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력과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안티오코스 1세는 자기가 죽은 뒤에 묻힐 무덤을 하늘과 가까운 높은 산에 만들고, 신들과 나란히 서 있거나 신들과 교류하는 신상을 만들어 놓으면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안티오코스 1세는 과대망상(誇大妄想)에 빠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의 과대망상 때문에 거대한 공사를 하느라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노역에 시달리고, 재물과 생명을 빼앗겼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런데 그의 과대망상이 낳은 작품이 2천여 년이 지난 뒤에 세계문화유산이 되고, 우리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주고 있으니, 아이러닉컬(ironical)하다이 지역에는 다음과 같은 콤마게네왕국과 로마 시대의 유적이 있다.

아르사메이아(Arsameia, Eski kale)

  콤마게네의 수도였던 곳으로, 왕족의 선조 아르사메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스키 갈레(Eski kale)오래된 성채의 뜻으로, 그곳 주민들이 부르는 지명이다. 158m의 땅속으로 가는 터널 입구 위쪽에 헤라클레스와 악수하는 안티오코스 1세의 아름다운 부조가 있다. 안티오코스의 아버지 미트리다테스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예니 칼레(Yeni Kale)

아르사메이아 옆에 보이는 250300m의 험한 바위산의 성채이다. ‘예니 칼레새로운 성채의 뜻이다. 자미, 욕장, 왕궁의 방, 아치식 천장의 홀(hall)이 있는데, 이것은 오스만 시대의 것들이다.

젠데레 다리(Cendere Köprüsü)

젠데레 강의 가장 좁은 곳에 있는 로마 시대의 석교로 길이는 120m쯤 된다. 이 다리에 남아 있는 석판에는 2세기 말의 황제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아내 율리아에게 바친다는 명문(銘文) 있다.

카라쿠쉬(Karakuş)

젠데레 다리 서쪽에 높이 30m의 무덤 있는데, 넴룻산의 무덤처럼 상자 모양이다. 도리스 양식의 기둥이 130m 간격으로 둘러싸고 있다. 동쪽 기둥 위에 2.5m의 독수리(Karakuş)의 상이 있다. 그래서 능 이름을 검은 독수리릉이라고 한다. 미트리다테스 2(재위 B.C. 3120) 왕이 어머니와 딸을 위해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