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도키아(Kappadokya)(2)
세 개의 아름다운 바위(Üç Güzeller)
옛날에 한 처녀가 한 총각을 몹시 사랑하여 결혼하려고 하였다. 처녀의 아버지는 딸이 그 총각과 혼인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다른 남자와 혼인시키려 하였다. 총각은 그 처녀가 자기의 아기를 임신한 것을 알고 쫓아가 처녀의 아버지에게 그 처녀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지 말고, 자기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아버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저 앞에 서 있는 세 바위는 이런 사연을 안고 있는 바위라고 한다. 이것은 세 바위의 형상을 보고, 터키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바위를 다시 보니, 그런 사연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언덕의 이름을 G 교수는 터키어로 ‘세 아름다운 것(Üç Güzeller)’이라고 하였다. 자연물은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무덤덤하게 보일 수도 있고, 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는 것 같다.
데브렌트 계곡(Devrent Vadisi)
윌귑에서 아바노스로 가는 길가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도 많은 차들이 서 있다. 능선 위쪽에 많은 바위들이 서 있는데, 보는 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보이므로 그 이름도 여러 가지 일 것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름이 있으니, 낙타처럼 보이는 ‘낙타바위’가 있다. 그 옆에는 손가락을 편 것처럼 보이는 ‘손가락바위’, 성모 마리아의 모습처럼 보이는 ‘성모 마리아바위’가 있다. 펭귄의 모습을 한 ‘팽귄바위’도 보였다. 낙타바위 뒤쪽을 올라가니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많았다. 자연의 섭리로 만들어진 바위의 모습이 참으로 다양하고 멋이 있었다.
데린쿠유 지하도시(Derinkuyu Yeraltı Sehri)
카파도키아에는 36개가 넘는 지하도시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그 규모를 보면 데린쿠유가 가장 크고, 카이막클르 지하도시(Kaymaklı Yeraltı Şehri)가 그 다음이다. 데린쿠유는 괴레메에서 남쪽 니데 방향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카이막클르에서 10km 쯤을 니데 방향으로 더 가야 한다.
이곳은 1960년대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인근 마을의 농부가 기르는 닭이 조그만 구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당국에 신고한 것이 발단이 되어 고고학박물관 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1965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맨 처음에 이곳에는 히타이트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원시 히타이트인들이 지하 1층을 저장고로 이용하며 살았는데, 그 이후에 다른 종족들이 와서 살면서 지하 8층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서기 6~7세기경에 기독교인들이 아랍 부족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은신하면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비밀 장소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데린쿠유는는 지하 7층까지 있고, 그 깊이는 85m나 된다고 한다. 수용 인원은 5,000명 정도라고 한다.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데, 직경이 1m쯤 되는 구멍이 수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구멍을 통하여 모든 층에서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구멍은 환기통의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이곳에는 교회는 물론 성경학교와 수도원이 있었고, 부엌과 식당, 침실, 응접실, 포도주 창고 등이 주로 1층과 2층에 있었다. 무기 저장고와 은신처, 그리고 다른 곳과 연결된 터널은 3층과 4층에 있었다. 터널은 대규모 침입이 있을 경우에 대피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인데, 카이막클르와도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통로에는 출입문을 막을 수 있는 둥근 돌이 있다. 이 돌은 장정 4~5명이 함께 밀어야 움직일 수 있는데, 이 돌은 홈에 꼭 맞도록 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열 수 없다. 필요할 때에는 이 돌로 통로를 막아 밖에서 쳐들어오는 적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피신할 때 이용하는 비밀 통로도 있다.
카이막클르 지하도시(Kaymaklı Yeraltı Şehri )
카이막클르 지하도시는 괴레메에서 남쪽 니데 방향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괴레메 야외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카이막클르 지하도시로 향했다.
카이막클르 지하도시는 깊이 55m, 지하 8층으로 각 층 수용 인원이 200명이라고 한다. 지하 구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라고 한다. 아래로 깊이 들어갈수록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지하에는 교회, 홀, 거실, 부엌, 외양간 등이 좁은 터널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암반을 파서 만든 절구, 와인을 만들기 위한 석조(石槽)도 있었다. 절구는 한국의 절구 모양과 비슷하여 흥미로웠다.
지표면과 연결되는 통풍구도 있는데, 이것은 굴뚝의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바위로 만든 원반형의 회전문도 몇 군데에 있다. 이것은 여닫이식으로 안에서 굴려 구멍을 막으면 밖에서는 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적이 침입했을 때 통로를 막는 데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곳의 지하 통로는 좁아서 허리를 굽히거나 쪼그려 앉아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곳도 있다. 나는 이곳을 지나다가 세 차례나 머리를 바위에 부딪쳤다. 두 번은 가볍게 부딪혀 조금 아팠지만 한 번은 ‘탁’ 소리가 날만큼 세게 부딪혔다. 그래서 운동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도 상처가 나서 피가 조금 났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속으로 입장료를 15리라씩이나 받으면서 안전모 하나도 준비하지 않고 손님을 맞는 이곳의 관광 서비스의 수준을 탓하였다.
* 이 글은 2012년 8월 25일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간행한 <<터키 1000일의 체험>> 중 <터키 여행의 즐거움과 보람>에 실려 있음.